Hiraeth,
체스터 부인은 불을 다룰 줄 아는 불의 마녀였다.
북부의 거주민 대다수가 검거나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것과 달리 부인은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본 사람들은 그것이야말로 불의 악마와 계약한 증거라며 그녀를 백안시했다. 그러나 일부는 그녀가 그저 히라이스 출신이 아닐 뿐이라 말했다. 실제로 누구도 귀부인의 결혼 전 성씨를 몰랐고, 이따금 그녀의 말씨에서 타지의 억양이 묻어난다는 것이 근거였다. 얼마 남지 않은 마을 처녀들은 그녀가 체스터 공작가의 차남이자, 변경백으로 지내고 있는 카시미르의 오랜 첫사랑일 거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몇몇 여행자들은 그녀가 용을 현혹해 부릴 줄 안다는 소문이 진실인지를 수소문했고, 초소를 지키는 노병들은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총기를 높이 샀다. 행상인들은 귀부인이 즐겨 마시는 차라며 손님을 호객했고, 어린아이들은 그녀의 자애로움을 노래하며 얼음을 끓이는 솥 앞을 지켰다.
동결과 불모의 땅이라 불리는 히라이스에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
제국력 457년의 일이었다. 진작에 절멸한 줄 알았던 고룡이 재래하며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영토 전쟁이 중단되었다. 카일룸 제국은 그 용의 이름을 겔루 프리구스gelu frīgus라 명명하며 임시 휴전을 선포했으나, 이후로 벌써 4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으니 사실상 종전에 가까웠다.
용은 지혜로웠고 인간은 교활했다. 용은 인간의 영토를 섣불리 침범하지 않고 자신의 땅을 지켰고, 인간은 용의 터를 기준으로 국경을 고쳐 쌓으며 침탈할 기회를 노렸다. 휴전 이후 백여년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진군하는 군사를 오래 참던 용은 결국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호흡했다. 그 단 한 번의 호흡으로 빙벽으로 향하던 수백의 병사가 즉사했고, 변경에 위치한 요새도시 히라이스에는 수십일간 해가 없는 겨울이 지속되었다.
그 덧없는 죽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용은 아홉 해마다 한 번씩 땅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히라이스로 망명한 적국의 토착민들은 이 기간을 스카마라고 부르며 달빛에 의지해 살아갔다.
스카마skabma, 즉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계절이었다.
그렇게 제국력 972년, 역사는 계속해서 적힌다.
그 해는 클로이 이디스 헤스티아가 자신의 성씨를 버리고 북부로 도망친 해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친구의 손을 놓던 마지막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이 살아남게될 줄은 몰랐으므로, 클로이는 마땅한 장화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그대로 축복의 땅이라 불리는 동부 지역을 빠져나왔다. 참 오래 걸었다. 오래도록 걸었고 끊임없이 걸었다. 길도 방향도 모르는 채로 이정표 없는 산과 숲을 넘었다. 처음에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뒤집어쓰고 있던 홑겹의 망토가 어딘가를 기점으로 그녀의 유일한 방한구가 되었다. 부리가 젖은 구둣발 아래로 대지가 얼어붙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날카롭게 벼려진 북녘의 바람이 쉴 새 없이 그녀의 뺨을 할퀴었다. 또 어딘가를 기점으로부터는 고운 소금 가루 같은 눈발이 허공에서 반짝였다. 비탈길을 오를 때마다 입가에서 반투명한 숨이 거푸 부풀었다. 더는 망토의 앞섶을 여미며 걷는 것조차 어려워지자 그녀는 차라리 몸과 주먹과 발가락을 웅크린 채 걸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데도 턱이 떨렸다. 이가 부딪치며 딱, 딱 소리가 머리로 울렸다.
어느새 망토의 모자가 벗겨져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다시 쓰지 못했다. 멍하게 발치를 보며 그저 걷고, 걷고, 걷기를 반복했다. 기다란 속눈썹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는다. 그러나 그것을 털어낼 힘조차 그녀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머리 위로 눈가 쌓였다. 처음에는 체온에 녹아 흘러내리기도 했던 게 이제는 더 빨아들일 온기가 없는지 곧 얼어붙었다.
사위가 희었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사방에는 온통 눈이 가득했다. 빛이랄 게 없다. 마을이 없고, 사람이 없다. 동부에서는 신비로운 이야기처럼 전해지던 북부의 민담에 거짓은 없었다. 이곳은 도저히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용의 저주로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했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만한 동그마한 땅이 이곳에는 없다. 벌써 수일째 먹지 못하고 쉬지 못한 다리가 기어이 꺾인다. 가시 같은 이파리가 돋아난 어느 나무 아래에 주저앉는다. 울음이 나지 않았다. 가물가물 눈꺼풀이 감길 뿐이었다.
*
벗은 발로 흙을 밟는 감각을 잊었다.
푹신한 녹음을 신은 것 같던 그때가 더는 떠오르지 않는다.
오종종하게 피어난 봄꽃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해서 피해 걷던 시절의 천진함이 까마득하다.
두 발로 대지를 딛고 볕을 쬐는 것이 당연하던 나의 고향, 사뿐사뿐한 걸음은 춤처럼 보이고 가사 없는 노래를 연이어 부르는 땅을 그린다.
필경 마지막이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는 친구의 얼굴이 겹쳐진다.
*
눈은 모든 소리를 소거했다. 눈을 밟고 나아가는 말의 발굽 소리마저도 그랬다. 클로이는 더는 눈꺼풀을 뜨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혹한에서 그녀가 처음 감각한 것은 기척이다. 검고 묵직한 기척. 맹렬한 북풍조차 그것을 휩쓸어갈 수 없지만, 동시에 언제든 떠날 수 있을만큼 미련 없고 엄정한 그림자였다. 다음은 소리다. 이미 그녀가 죽었다 판단한 말은 푸드득 머리를 털며 긴장을 늦춘다. 안장을 밟고 내려오며 금속물끼리 부딪는 소리가 잘그락잘그락 침묵을 바수었다.
“……아직 숨이 붙어있군.”
거칠거칠한 장갑이 그녀의 얼굴에 닿는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누군가는 속삭였다. 정신이 혼몽했다. 살얼음이 낀 눈자위를 겨우 올려뜨자, 물에 적신 것처럼 시야가 부얬다. 빛이 없어 사방이 어두웠으나 칠흑 같지는 않았다. 달빛이다. 달을 먹고 빛을 뿜어내는 눈이 밤을 밝힌다.
그녀가 입을 벌렸다. 고작 그 정도의 움직임으로 뼈끼리 어긋난 것처럼 밀려드는 격통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발목과 배를 물어뜯긴 것 같다. 안쪽으로 굽어 얼어붙은 어깨죽지에서 도저히 힘을 풀 수가 없었다. 발성을 담당하는 기관이 지워진 것처럼 그녀는 세상에 그 어떤 소리도 내어놓을 수 없었다. 결국 입술은 야트막하게 벌어진 것에 그친다.
“……”
카시미르는 다시 클로이의 눈이 감기는 것을 보았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집을 뒤로 넘긴 뒤 옹송그린 이방인을 안아들었다. 사람인지 미물인지 판별할 수 없었으나 이대로 버려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타고 온 말 역시 그의 결정에 이견이 없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등을 낮추었다.
고삐를 당기자 검은 말은 눈안개를 헤치며 나아갔다.
*
사흘째 저녁에 클로이는 눈을 떴다. 해가 지자 다시 커튼을 닫기 위해 방에 온 여자 하인이 그를 보고 놀라 이를 곧장 변경백에게 알렸다. 카시미르는 그녀의 방에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조금 전에 보았던 그 하인이 클로이에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물었다. 여전히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어떻게 이런 곳에 오게 되었는지 무엇 하나 알지 못하는 클로이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은 성의 보온 마법을 보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이 정도면 될 거라고 말하며 낡은 모포를 건넸다.
접견실로 향하는 동안 하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날씨가 어떤지, 몸은 괜찮은지, 하다못해 그녀가 처음 이 곳에 도착한 날 자신이 얼마나 놀랐으며 며칠만에 눈을 떴는지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견고한 석벽 밖으로 세차게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잇따라 창문이 흔들렸지만 이곳에서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큼 예사롭고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누구도 시선을 향하지 않았다. 복도 중앙을 따라 길게 늘어진 붉은색 융단 위를 걸으며 클로이는 무례하지 않을만큼만 주변을 살폈다. 내부는 어둡고 투박했고, 희미했다. 건물이 간직한 아름다움은 진작 쇠퇴되었으며 오로지 공동 생활에 역점을 둔 기능적인 것들만이 꾸준하게 관리되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남자가 이곳의 주인일까. 흐리멍덩한 시야로 겨우 본 검었던 머리와 창백한 피부, 두툼한 가죽 옷과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던 얼굴 같은 것을 클로이는 복기했다. 얼어붙은 흙의 냄새가 나던 남자. 크로노스의 자녀들이라 불리는 그림grim족을 실제로 본다면 꼭 그런 모습일 거라는 감상이 들자, 문득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모포 아래로 손등을 만져봤다.
다행히도 따뜻했다.
*
손님이 드문 성의 접견실은 살풍경했다. 커다란 창과 양탄자, 벽난로와 테이블 등 구색은 갖추고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형식에만 그치는 수준이었다. 샹들리에는 크리스탈이 아닌 은색의 촛대들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양탄자는 눈이 묻은 구둣발로 적셔졌다 마르기를 반복한 탓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로 가득했다. 테이블은 사용하지 않는 모양인지 얇은 천이 덮여 있었다. 벽면에 일렬로 장식된 이름 모를 선대들의 사진은 위엄 있게 보인다기보다는 스산하게 보였다.
남자는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쓸모를 다하고 있는 벽난로에 장작을 던져넣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나무가 불에 타며 수피가 갈라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클로이는 단번에 그가 마지막에 본 그림족과 닮은 사내라는 걸 알아차렸다. 불그림자가 일렁이는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동부에서 왔나?”
인사를 주고받기도 전에 대뜸 출신지를 묻는 말에 클로이의 어깨가 떨렸다. 제국에서 수배령이라도 떨어졌나 하는 공포로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남자는 경직된 몸을 보는 것에 익숙했다. 공포나 불안, 긴장감을 품은 사람들은 아무리 태연함을 가장해도 어쩔 수 없이 다리만은 굳었다. 바로 옆에 소파를 두고도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클로이를 남자는 한동안 더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자리에 앉은 뒤였다.
“그런 건 상관없겠지. 어차피 이곳은 망명자들의 도시이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클로이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남자는 무엇이든 꿰뚫어볼 듯 예리하고 동시에 그의 기척처럼 묵직한 붉은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눈에 비친 벽난로의 불꽃이 고요히 일렁였다. 더는 질문하지 않는데도 그가 점거한 침묵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확고했고 또 완강했다. 추궁을 당하는 듯한 기분에 결국 클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위리디아에서 온 클로이라고 합니다. 사정이 있어 이곳까지 다다르게 되었어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리디아는 동부 지역이었다. 예상처럼 남자는 그녀가 동부에서 온 것을 알고도 여전히 입을 다문 채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겉치레로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녀를 위로하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이곳으로 안내한 하인이 말수가 없었던 건 역시 그의 영향일까 생각하며 클로이는 눈치를 살폈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가진 건 없지만, 챙긴 옷가지에 보석이 조금 있으니 그걸로라도 사례하게 해주세요.”
“……”
“……”
“그걸 나에게 주면 그다음은 어쩔 생각이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누군가가 뒤흔드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접견실의 창문이 흔들렸다.
“두 발로 직접 빙원을 헤맸으니 이미 알겠지.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땅이다.”
최북단의 도시, 히라이스. 자신의 이름보다도 그녀가 다다른 땅의 이름을 그는 먼저 가르쳐 주었다. 휴전 이후 카일룸 제국에 병합된 이국의 땅이었다. 거주민이 수도의 백분지 일도 채 되지 않으며, 거개가 전쟁 후 망명을 신청한 토착민들에 뿌리를 두는 곳. 제국이면서 제국이 아닌 도시.
그래서였구나, 하고 그녀는 수긍했다. 거주지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하고, 흡사 요새처럼 보였던 이 성은. 사치와 호화를 부정하며 오로지 생존에 요를 두는 것 같은 청빈한 사물들을. 웃음도, 울음도 어느 표정도 짓지 않고 무기질적인 문장만을 말하는 눈앞의 남자를.
“사용하는 언어를 보아하니 평민의 여식도 아닌 것 같은데 행상인들조차 드나들지 않는 도시에서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무엇이든요.”
“……”
“살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을 거예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할 겁니다.”
남자는 전보다 뚜렷하게 눈을 마주쳐왔다. 그녀가 품은 결의를 측량하듯 길고 끈질긴 시선이었다.
그러자 서러웠다. 친절과 환대마저 바라지는 않았으나 추궁과 탐문, 투시를 견디기엔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발을 붙이고 설 그 한 평의 땅이 자신에게만은 주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을 자신으로서 인식해주고 구별해주는 기준을 세상에게 송두리째 빼앗긴 것만 같았다. 누구도 그녀를 클로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사경을 헤매던 끝에 다시 살아 돌아왔으나 그에 벅차올라 힘껏 끌어안는 품이 어디에도 없었다. 차지하는 부피를 최소한으로 해야 할 것 같은 기분.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쉬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녀는 불긋하게 병변이 일어난 열 개의 손가락으로 드레스 자락을 쥐었다. 울음이 터져나올 때처럼 입가가 오그라들 것 같아 억지로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코로 뱉는 숨이 흐트러졌지만 그래도 그녀는 시험대 앞에 선 종교인처럼 결코 시선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는 그 모든 동요를 지켜보았다.
“……아홉 해째 겨울이다.”
“……”
“곧 용이 숨을 내쉴 거고, 그럼 적어도 석 달은 눈보라가 그치지 않을 테지.”
위리디아에서 나고 자란 그녀로서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다를 것이 없었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도시에 석 달간 들이치는 눈보라가 유별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놀란 이유는 오로지 남자의 말들 때문이었다.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앞선 대화의 흐름과는 조금의 연관도 없이 목적만을 위해 툭툭 던져놓는 말들에 클로이는 익숙해질 수 없었다.
아무렴, 남자는 그런 그녀의 반응까지 상관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처음보다 불길이 사그라졌나 싶은 벽난로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여기에 머무는 게 좋겠군.”
불더미 속에 장작 두 개를 던져 넣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발갛게 달아오른 나무의 단면이 불꽃을 품고 타들어갔다. 남자는 곧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온 여자 하인이 허리를 숙여 그를 배웅했다.
*
클로이는 히라이스에 머물렀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제안을 그녀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흘 뒤부터 본격적인 스카마가 시작됐다. 첫날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깨어나고 또 깨어나도 도저히 깨어날 수 없는 악몽 같은 것을. 언제 눈을 떠도 밤은 계속됐고, 그녀의 창 밖 너머로 보이던 소초탑조차 어둠에 칠해졌다. 가뜩이나 말소리가 귀했던 성내에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게 됐다. 처음에 그녀는 그 침묵이 무언가의 의식이라고 생각했으나, 얼마 뒤에는 그저 이 긴 어둠을 인내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의 사람들은 촛대에 의존해 살아갔다. 정확히는 초에 붙인 신비로운 불에 의존했다. 그 불꽃은 거뭇한 테두리를 가지고 있었고, 밖으로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나 동시에 안으로 타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썩은 창틀 사이로 들이치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물로도 그 불꽃을 사르지 못했다.
그리고 개. 히라이스에서는 이 시기에 개를 자주 이용했다. 편지나 물건을 주고받을 때도 그랬고, 피치못할 사정으로 나갈 일이 생긴다면 개 여럿에 끈을 묶어 간이 마차로 이용했다. 언젠가 영지민의 서신을 운반한 개의 목덜미를 쓸어주며 클로이가 어째서 개였냐고 묻자, 시종은 그들이 요청한 약품들을 챙기며 개밖에 없었기 때문, 이라고 일축했다. 어린 새의 날개로는 눈보라가 치는 하늘을 비행할 수 없고, 순록은 밤을 보는 눈이 어두웠으며, 고양이에게는 충성심이 없고 수리들은 지나치게 총명하여 이 시기에 방벽 밖을 나가지 않는다고. 그러니 할 수 있는 선택은 정말로 개뿐이었다고, 그는 토박이의 말씨로 대답했다.
“불씨를 꺼트렸다고 하더군요. 아마 며칠 버티지 못하겠죠.”
클로이는 그것이 방금 떠나보낸 개 주인의 이야기라는 걸 알았다.
“이 성에서 사용하는 그 특별한 불을 저들에게도 나눠주면 안 되는 거였나요?”
“외부에는 반출이 불가능합니다.”
“어째서죠?”
“변경백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변경백이라면 카시미르를 말하는 것이었다. 클로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가 종종 머무르고는 했던 접견실 한편에 놓인 의자로 향했다.
클로이가 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달포에 가까웠으나, 그녀는 아직도 그에게서 소개를 듣지 못했다. 소개는커녕 같은 장소에서 머무는데도 좀처럼 얼굴을 마주치기가 힘들었고, 대화를 나누기는 그보다도 어려웠다. 그녀는 그림족을 닮은 그 남자가 궁금했다. 혹독한 추위에서 자신을 구하고 거처까지 마련해준 남자에 대해 알고 싶었다. 어째서 그는 자신의 영주민이 죽을 것이 분명한데도 어째서 불씨를 나누어주지 않는 건지.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종일 북쪽 탑에 머물며 무엇을 하는 건지. 체스터라면 제국에서도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는 저명한 대공가인데, 어째서 이런 황량한 땅의 변경백 작위를 물려받게 된 건지. 웃지도 울지도 않는 그가 화를 내거나 경멸조차 하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인 건지.
어째서 그는 평화의 선언자이자 반역자라는 상반되는 이름을 가지게 된 건지.
왜 그녀에게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건지.
타당한 궁금증에서부터 그의 기호, 자주 입게 되는 옷의 색이나 검의 장식, 사소한 습관과 언젠가, 아주 나중이라도 좋으니 눈과 입을 접어 환하게 웃을 그의 얼굴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그녀는 점차로 알고 싶어졌다.
*
“오, 오늘 식사가 맛있었죠?”
“……”
“나, 날씨가…… 날씨가 좋더라고요.”
클로이의 말에 카시미르는 창 쪽으로 시선을 흘겼다. 그곳에는 여전히 음산한 어둠이 펼쳐져 있었고, 유달리 시야가 나빠 눈이 오고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이런 날씨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힐난이나 조소가 섞여 있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뒤늦게 경치를 확인한 클로이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게, 그러니까……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자 그녀는 우물쭈물 말을 흐리며 들고 있던 경전을 꾹 쥘 뿐이었다.
중앙탑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길이었다. 무슨 일인지 하루의 대부분을 북쪽 탑에서 보내던 카시미르가 그곳에 있었다. 가벼운 묵례만을 남기고 그대로 스쳐지나가려던 그를 붙잡겠다는 생각까지는 좋았으나, 방법이 영 좋지 못했다.
“그…… 그러니까……”
“……”
“이, 이름! 아직 이름을 못 들었는데…… 요.”
줄곧 고요했던 카시미르의 표정 위로 옅은 파문이 일었다. 워낙 표현이나 변화가 귀한 상대였기에 클로이는 그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목숨을 구해준 상대에게 보답을 하기는커녕 외려 난처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생각에 목구멍 안쪽이 뜨끔거렸다. 결국 조급심에 꺼내놓은 자신의 궁색한 핑계를 시인하고자 그녀가 입을 열었을 즈음이었다.
“카시미르.”
“네?”
“체스터 공작가의 차남이며, 이곳 히라이스의 변경백인 카시미르 보레아스 체스터다.”
“……”
“진작 다른 이들에게 이름을 들었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무례했군. 늦어진 점을 사과하지.”
위리디아의 출신이라는 것만 밝혀졌을 뿐, 가문도 나이도 모르는 그녀에게 그는 예의를 갖춰 자신을 소개했다. 무례를 저지른 건 오히려 자신의 쪽이라 생각했던 클로이는 그의 사과에 말문이 막혔다. 경전을 들고 있던 손 끝에 힘이 들어갔고, 창피함에 발갛게 달아올랐던 그녀의 얼굴은 다른 의미로 물들었다.
“드, 들었어요. 변경백님의 존함이 카시미르라는 것도, 체스터가의 분이시라는 것도…… 근데, 그, 오늘은 그냥 변경백님과 대화를, 그러니까 반가워서……”
“……”
“……죄송해요.”
“다행이군.”
“네?”
예상치 못했던 말에 클로이가 되물었지만, 카시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차 묻기에도 어딘지 멋쩍어 그녀 역시 화제를 돌렸다. 때문에 그것이 그저 클로이에게 무례를 저지르지 않아 다행이라는 뜻이었다는 걸, 그녀가 알게 되는 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었다.
“……중앙탑에서 뵙는 건 오래간만이네요.”
두 사람은 일정한 침묵을 사이에 둔 채 걸었다. 처음 이곳에 왔던 날과 변함없이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는 어둡고 침침했으나, 그 풍경이 전처럼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어느덧 문틀이 덜컹거리는 소리에도 그에 일일이 놀라지 않게 된 클로이는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카시미르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적응은 마친 모양이군.”
활기를 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시미르가 말했다.
“네, 덕분에요. 얼마 전에는 퀼과 둘이서 향신료 창고와 식기 저장실까지 전부 청소했어요.”
퀼은 이곳에서 가장 어린 하인의 이름이었다.
올해로 열한 살이라는 그는 북부에서 나고 자란 이답게 하얀 머리색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장난을 칠 때마다 꼭 개구쟁이처럼 주근깨가 난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고는 했는데, 클로이는 아이의 그런 버릇이 유독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그때 일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덧 명랑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퀼은 분명 훌륭하게 자랄 거예요. 그 나이에 벌써 손재주가 저보다도 좋고 머리도 얼마나 영민한지 지난밤에 영지에서 개를 보냈을 때도……”
지난밤. 아픈 아내를 위해 약제를 요청하는 편지를 받은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불씨를 꺼트렸으니 며칠 버티지 못할 거라는 나이 많은 시종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클로이는 쉽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들은 무사한가.
누군가를 위해 간절한 문장을 적을 수 있는 그들은 이 고요한 악몽 속에서 깨어있을까.
여전히 새까만 어둠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더듬으며, 체온을 감각하며 아직 살아있다 안도할까.
눈을 뜬 첫날에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째서 불씨를 나눠주시지 않는 건가요?”
“……”
“히라이스에 온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빛이 없다는 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건지는 알아요. 어쩌면 타지인인 제가 이런 참견을 하는 게 주제 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불만 있다면……”
“타지인인가?”
“……네?”
“나는 너 역시 히라이스인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종잡을 수 없는 대화다. 클로이는 말문이 막힌 채 카시미르를 건너다봤다. 혼란스러움과 당혹감, 기쁨, 감사,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포용심과 여태 가시지 못한 영지민들에 대한 애처로움 같은 여러 감정들이 그녀의 가슴 안쪽에서 교차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그는 여전히 평소와 같은 표정 없는 얼굴로 침묵했다.
“불씨는 나누어줄 수 없다.”
“……변경백님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요?”
“그래.”
그녀는 그의 완강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한 달, 깊은 대화를 나눈 것도 서로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카시미르는 냉혹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클로이는 알고 있었다. 그는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타지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살려준 값을 치르겠다는 말을 듣고도 당장의 이익보다 상대의 앞날을 염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목숨을 잃지 않게 거처를 마련해줄 수 있고,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믿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째서 불에만큼은 인색한지, 그녀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어째서인가요?”
“……”
“변경백님은 그런 분이 아니신데 어째서 죽어가는 주민들을 외면하시는 건가요.”
“내가 너를 이해시켜야 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군.”
분명하게 선을 긋는 듯한 말에 클로이의 입술이 천천히 다물렸다.
다시 그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는 눈으로 카시미르는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법으로 피워낸 불. 그것을 피워낸 이의 이름을 그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그러니 이번에도 예외를 두지 않기로 했다.
꺼지지 않는 검은 테두리의 불꽃은 초를 녹였다. 겉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촛농은 고름 같게도 보였다. 누구도 쉽게 흩뜨릴 수 없는 침묵은 밀도를 가중했다. 석벽에는 길쭉하게 늘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
겨우 밝아졌던 얼굴이 다시 얼어붙은 게 보였다. 상처가 기워졌나 했더니 결국에는 이처럼 허무하게 수포로 돌아간다. 그녀가 회복하는 과정을 보는 게 좋았다. 어린 하인 하나와 창고에 있던 향신료를 모두 정리하고 그릇을 닦은 이야기는 이미 진작 들었었다. 그녀를 히라이스인이라 생각한다는 그의 말 역시 진심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예외는 없어야 했다.
불꽃을 피워낸 사람의 이름을, 그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히라이스를 포함해 이 성에 사는 누구도 그 존재를 알아서는 안 됐다.
어느덧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작아진 몽당초를 바라보다 그는 돌아섰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어두운 복도를 나아갔다.
클로이는 붙잡지 못했다.
*
얼마 뒤, 태양이 뜨지 않는 히라이스의 절기에 검은 불을 두른 마녀가 나타났다.
태초에 불을 사용하던 이 마녀의 이름은 이블린 노토스 체스터다.
제국에 쫓기고, 가문에 쫓기며 모든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한 그녀의 생사가 십여년 만에 처음으로 이곳에서 확인된다.
역사는 계속해서 적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