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쌓인 눈이 녹았다.
얼었던 땅에는 새순과 작은 꽃들이 돋기 시작했고, 호수에는 작은 나룻배를 띄울 수 있게 되었으며 짐승의 털로 만든 두꺼운 옷 대신 꽃을 수놓은 밝은 색의 옷을 입은 이들이 마을 곳곳에 나타났다. 이는 시타델의 가장 큰 축제인 하지제가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제국의 국경. 최북단에 위치한 시타델은 다른 지역에 비해 여름이 늦게 찾아온다. 수도의 장미원은 5월 초면 온갖 종류의 장미가 만개해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낸다지만, 북쪽은 5월 중순까지도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5월 말에야 비로소 '봄'이라고 부를 만한 기온이 되고, 그리고 다시 두 달 뒤면 산을 넘어 한기가 밀려오기 시작하니 이 짧은 봄—봄인지 여름인지, 하여간 시타델 사람들은 그 둘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았지만—이 반가운 것은 당연지사였다.
영지에서의 첫 하지를 맞는 마법사 셀레스트에게는 이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는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은 수도 서부 출신이라, 시타델에 처음 왔던 지난 겨울 지독한 감기를 앓았었다. 불과 몇달 전, 가게에서 자신의 겨울 옷을 맞추던 중에 내려다봤던 광장은 황량했었으나, 여러 꽃과 리본 등으로 장식된 메이폴 주변을 도는 활기찬 사람들이 가득한 여름의 광장을 바라보며 그는 비로소 혹한의 종막을 실감했다.
셀레스트는 마을을 지나, 광장을 지나, 그렇게 또 얼마간을 걸어 히엠스 성에 도착했다. 국경을 지키는 견고한 성채이자, 시타델의 영주성인 히엠스 성은 또한 셀레스트의 집이기도 했다. 아녜스와 대련할 때 자주 사용하는 연병장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하고, 괜히 복도에 걸린 그림과 눈싸움을 해 보기도 하다가, 기사 둘이 지키고 있는 문을 넘어 안채에 들어갔다. 활기찬 마을과는 다르게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안채는 본래는 변경백과 그 일가가 살았던 곳이지만, 이전 몇 년간 의 전쟁 때문에 남은 핏줄이라고는 당대 시타델 변경백인 아녜스뿐이었다.
반 년 전, 아녜스는 대륙을 떠돌던 셀레스트를 시타델로 데려오며 안채에서 두 번째로 넓은 방을 선물했다. 영지 전속 마법사에게는 다소 과한 대우였지만, 이 점을 우려하는 가신들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에 곁을 지켜주었던 아카데미 동문에 대한 의리'라며 염려를 일축했던 아녜스의 모습이 셀레스트는 아직도 생생했다. 아카데미 시절, 그토록 불안정했던 아이가 멋지게 성장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변경백의 방 앞이었다. 셀레스트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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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는 뜻하지 않게 다소 어린 나이에 변경백위에 오른 이후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만 하는 것을 행하는 삶을 살아왔다. 언제나 시타델 변경백이라는 지위가 아녜스 개인에 우선했다. 그러한 삶에 익숙해지니, 점점 진실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는 지경에 다다르기까지 했다. 그렇게 위태로운 때에, 아녜스를 붙들어준 것은 셀레스트였다.
아카데미 시절에는 방에 틀어박혀 공부에만 매진하던 아녜스를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비밀 장소로 데려가 낮잠을 재우기도 했고, 졸업 이후에는 주기적으로 보내오는 셀레스트의 편지가 아녜스의 휴식 시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셀레스트는 아녜스에게 있어 은인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고,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한 부분으로 남았다.
그런 셀레스트가 떠돌이 마법사 신세가 되었을 때에 아녜스는 선뜻 그의 돌아올 곳을 자처했다. 비록 시타델은 제국 최북단의 추운 지역인 데다가, 타국의 국경과 맞닿아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변경이지만 이런 요새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집이 되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셀레스트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게 된 것도 어느덧 반 년이다. 한가할 때는 마을로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기도 하며 셀레스트와 아녜스는 서로의 인생에서 대체 불가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지나 마침내 여름. 아녜스는 시타델에서의 첫 하지제가 그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거울 앞에 서 셔츠의 끈을 마저 묶었다.
"아녜스, 있어요?"
문 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아녜스는 웃으며 문을 열었다.
"멋진 옷이로군."
"옷이 날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네요-"
그 말과 함께 셀레스트는 한 바퀴를 돌았다. 치마가 넓게 펼쳐지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아녜스는 셀레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체칠리아 광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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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는 악단이 연주하는 흥겨운 음악이 울려퍼지고, 저마다 웃는 얼굴로 춤을 추고 있었다. 수도의 무도회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아녜스와 셀레스트가 광장에 도착하자 잠시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이 양 옆으로 갈라섰다. 아녜스는 셀레스트를 에스코트하여 중앙으로 걸어갔다.
아녜스의 신호와 함께 다시 음악이 시작되었다. 이번 곡은 제법 빠른 춤곡으로, 둘씩 짝을 지어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셀레스트는 아녜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아녜스는 셀레스트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옅은 미소를 띤 채 빠른 템포의 스텝을 밟던 아녜스가 입을 열었다.
"춤 실력이 제법인데?"
셀레스트는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아카데미 때에 당신이 가르쳐 줬잖아요. 그전까지는 온 세상 사람들 발을 다 밟고 다녔었는데~”
“그럼, 기억하지. 졸업 무도회 때 친구들의 발을 밟고 싶지 않다며 나한테 찾아왔었지 않나.”
“스승을 잘 둔 덕에 창피를 면할 수 있었다니까요.”
아녜스는 또 다시 한 바퀴를 유려하게 돌고는 물었다.
“시타델에서의 생활은 이제 익숙해졌나?”
“조금요. 고향보다 훨씬 춥기는 하지만,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그곳에는 거울 같은 얼음 호수가 없었거든요. 그런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본 적은 더더욱 없었답니다.”
셀레스트는 활짝 웃었다. 실로 여름 햇살을 닮은 미소였다. 아녜스는 눈을 몇 번인가 끔뻑이더니 덩달아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웃어본 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 같았다. 셀레스트와 함께 있으면 아녜스는 언제고 때묻지 않은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시절을 함께했던 아버지와 페터는 이제 곁에 없지만, 이제는 그들을 마음 속에 묻고 새로운 행복을 향해 나아갈 때가 왔다. 아녜스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의 곁에는 소중한 동료이자 가족인 셀레스트가 있다.
“…고맙네, 셀레스트.”
“새삼스럽게 왜요?”
“그냥.”
“뭐예요, 춤에 집중하라구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에도 끝은 존재했다. 아녜스와 시타델에는 다정한 여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