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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hony

  꿈을 꿨다.

  느지막히 일어나는 카일 피어시의 평소와 달리 오늘은 아직 해가 뜨기 전인지 주변을 둘러봐도 시야가 어두웠다. 충격적이었던 꿈 내용이 잊혀지지 않아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그제서야 카일의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규칙적인 숨소리는 진정하는 데에 꽤 효과가 있어 꽤 긴 시간을 가만히 듣다가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꿈이라고는 거의 꾸지 않는데, 하필 꾸는 대부분의 꿈은 악몽이었다. 주로 꾸는 가족과 관련된 어린 시절의 꿈은 이제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었는데, 카일에게 있어 노벨라 오하라와 관련된 꿈은 그게 어떤 내용이든 반칙이었다. 그나마 노벨라가 곤히 자는 모습을 보며 어느 정도 진정을 했지만. 그럼에도 카일이 꿈에서 느꼈던 감정은 워낙 실제 같아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그리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물에 흘려보내기 위해 샤워실로 향했다. 카일은 차가운 물줄기를 맞으며 꿈 내용을 다시금 짚어봤다.

  꿈 속에서의 노벨라와의 관계는 현재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현재 카일 피어시와 노벨라 오하라와의 관계는 부부이다. 둘 다 소중한 존재 없는 지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기로 약속했고, 함께 살 집을 지었다. 우편물을 함께 확인하다 피어시라는 성을 끔찍하게 여기는 카일을 위해 노벨라는 성을 빌려주겠다 했고, 그렇게 결혼 서류를 제출했다-우주에 다녀온 유명인 둘의 결혼이라 세간에 말이 많이 돌았지만 정작 이야기의 주인공인 둘은 그런 일에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기에 잘 몰랐다-. 하지만 꿈속에서 카일은 우주선에 타고 있었으면서 노벨라와 연인 관계였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부부지만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 지금 관계와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분명 카일 본인이 죽기 전의 시점 같았는데, 살면서 절대 내뱉을 것 같지 않았던 말을 내뱉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카일 피어시의 사전에 새로이 등록되는 순간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사랑, 그러니까 그 감정을 지금의 카일 본인에게 대입해봐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분명 가장 차가운 물을 틀어둔 것 같았는데, 도움이 안 된다. 저 밑에 묻혀있던 감정을 깨닫자 카일은 평소와 같이 노벨라를 대할 자신이 없어졌다. 생각이 복잡해진 만큼 긴 샤워를 끝내고 나가려는 참에 카일은 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 머리를 말리다 말고 침실로 돌아갔다. 어디 있었습니까. 샤워하고 나왔어. 오늘 이상합니다, 저보다 먼저 일어났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새벽 자각했던 감정이 계속 떠올라 카일은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별수 없이 하루 정도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약속이 있어서 그랬다고 둘러댔다.

  “누구와의 약속입니까?”

  약속 상대를 물어보면 데스티니 호에 함께 탑승했던 아무나의 이름을 대충 말하고 최대한 어색해 보이지 않게 표정을 관리하며 침실을 빠져나왔다.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평소라면 함께 했을 아침은 생략, 바로 나갈 준비를 하고 저녁 전에 들어오겠다는 말을 남긴 후 집을 나섰다.

  혹시 노벨라가 산책을 나올지 몰라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운전해 아무 카페나 찾아 들어갔다. 일찍 일어난 데다 꿈의 여파 때문인지, 이상하게 피곤한 것 같아 차가 아닌 커피를 주문해 구석 자리에 앉았다. 혼자 있다는 사실이 실시간으로 퍼지면 안 됐기에 모자를 눌러 썼는데, 다행히 아무도 알아본 것 같지 않았다.

  감정은 이미 확실하게 결론이 났는데,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 머리를 싸매던 중, 형식적인 결혼이었을 뿐이지만 프러포즈도 없었고 결혼 반지도 마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들자 카일은 마시던 커피를 내버려 두고 카페를 나왔다. 차를 몰아 백화점으로 향하며 머릿속으로 대충 세워본 계획은, ‘일단 반지를 주고 반응을 지켜보다 고백하자’는 것이었다.

  어떻게 고백을 해야 할 지도 난관이었기에 여러 방법을 생각하는 와중에도 물건을 보는 감각은 별개의 것이라, 카일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깔끔하고 독특해서 시선이 가는 반지를 골랐다. 사이즈는 어림짐작이었지만 아마 정확할 것이다. 마음이 기울자 망설이지 않고 바로 결제를 했다. 미약하게 무게가 느껴지는 주머니와 함께 밖으로 나오자 오후 즈음 되어 보이는 것 같아 시간을 확인했다. 네 시 언저리, 저녁 전에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면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근처에서 적당한 저녁거리를 사 들고 집에 도착하자 노벨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는데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자각하자 술렁이는 마음이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최대한 멀쩡한 표정을 연기하며 저녁을 함께했다. 사실 저녁 시간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길게만 느껴졌던 저녁 시간이 끝나고 정리를 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다며 이 층으로 향했다. 반지를 줘야 하는데. 아래에는 아마 차를 내리고 있을 노벨라가 있다. 괜히 시간이라도 끌었다가 의심을 받으면 곤란했기에 오늘 계획을 진행하자고 생각하며, 정장을 캐주얼하게 매치해 입고 바지 주머니에 반지 케이스를 넣었다. 조금 전 오늘 뭔가 이상한 것 같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하던 노벨라가 생생해 급하게 결정을 내렸음에도 후회는 되지 않았다.

  짧게 심호흡을 하고 계단을 내려가자 갑자기 이유 없이 차려입은 모습에 물음표를 띄운 노벨라가 가장 먼저 보였다. 냄새를 맡아보니 오늘의 차는 다즐링이다. 익숙한 냄새에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아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고,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늦어서 미안.”

  “…….”

  사과하며 건네주는 모양새가 썩 별로였지만 이 이상 늦는 것보다는 나았다. 조심스레 손을 잡아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고 고개를 들자 눈물이 맺힌 노벨라가 보였다.

  “너 울어?”

  “몰라요.”

  싫다는 건가. 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보니 반응이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보였고, 카일은 내심 안심했다. 뜬금없는 타이밍입니다. 나도 알아. 사실이었기에 순순히 대답하고는 분위기를 살폈다. 아직 해야 할 말이 한 가지 더 남아있었다.

  노벨라.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구경하고 있던 노벨라가 고개를 들자 카일은 제 반지와 왼손을 내밀었다. 나도 끼워줘.

  카일은 노벨라가 자신이 스킨십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순간 긴장했지만 반지의 여파인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노벨라에게 반지를 끼워줄 때 잡았던 손이 기분 나쁘지 않음을 확인했다. 오히려 더 닿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감각이라, 제 마음에 대한 확신만 한 번 더 한 셈이다. 그리고 해야 하는 말이 하고 싶은 말이 되었을 뿐.

  카일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준 노벨라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카일은 곧 제가 할 말이 이 좋은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를 바라며 입을 뗐다. 물론 카일 피어시는 노벨라 오하라가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자각한 상태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관계가 크게 어그러지지 않을 거라는 예상. 저에 대한 어느 정도의 호감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까지 이미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있잖아, 할 말이 있어.”

  뭡니까.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저 얼굴에 지금 카일은 파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나 너 좋아해.”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갑자기 건넨 반지보다 더 뜬금없는 타이밍의 고백에 실시간으로 변하는 노벨라의 표정을 구경하는 것은 꽤 흥미로웠다. 답을 기다리는 입장이라 떨고 있는 주제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웃겼지만. 어느 정도 진정을 하자 시작된 질문 세례에 꼬박꼬박 답을 해주었다. 차분하지만 진심을 담아 솔직하게 답하자 노벨라는 어느 정도 납득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저를 좋아합니다. 그럼 뭘 하고 싶습니까. 카일은 속으로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건가, 싶은 생각을 했다. 답은 당연한 거 아닌가.

  “결론은 맞는데. 좋아하니까, 너랑 사귀고 싶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이긴 한데, 사귀는 건 아니었으니 나름 맞는 대답이라 생각했다. 스킨십은 어디까지 가능할지 확실하게 답을 주지는 못하지만 방금 손을 잡았을 때도 괜찮았다고 덧붙였다. 아니, 좋았다고. 그러자 이제서야 반지를 끼워주며 접촉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보였다. 왜인지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보다 스킨십을 할 수 있다는 말에 더 놀란 것 같은데. 기분이 묘해졌다.

  “이거 카일 맞습니까? 저를 얼마나 지독하게 좋아하는 겁니까?”

  어이없다. 기껏 사람이 마음을 먹고 고백했더니, 노벨라는 늘 이런 식으로 진지한 분위기를 깨고는 했다. 물론 그게 싫다는 것은 아니다.

  “단어 선택이 왜 그래? 널 좋아하는 건 맞는데, 왜 내 사랑을 지독하게 만들어.”

  울컥해서 카일이 반박하자 노벨라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도 지독하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는 물음에는 정말 삐질 뻔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좋다는 말에 그나마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후에 또 한 번 들려오는 지독한 수준이라는 묘사는 알아서 걸러 들었다. 저 좋아합니까? 그렇다니까. 그런 의미로요? 어.

  “우리… 그런 사이입니까?”

  “그런 사이인지 아닌지는 이제 네가 답할 차례인 것 같은데.”

  지금껏 이어진 대화를 생각해보면 거절은 아닐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럼… 우린 그런 사이입니다.”

  결국 받아낸 대답이었다. 다시 한번 드는 생각이지만, 부부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임을 감안하면 정상적인 연인의 과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각이 늦었던 것 뿐이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을 리가 없으니 모로 가도 정착지만 같으면 된 것 아닌가. 카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오늘 꾼 꿈은 악몽이 아니라, 처음으로 현실에 도움이 되는 꿈이어서. 오늘 하루는 시작부터 좋았던 드문 날 중 하나라고도 생각이 들었다. 내일부터는 다른 이유로 매일같이 하루의 시작이 좋을 거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카일은 노벨라의 손을 잡고 기분 좋게 웃었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았다.

  이제는 익숙해져도 된다는 사실이, 카일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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